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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1878년 11월 9일, 도산 안창호 출생
2. '노내미집 셋째'
3. 1894년, 구세학당 입학

4. 1897년, 약혼녀와 여동생도 신식학문을...

5. 1897, 독립협회와 안창호
 
도산이 소년시절을 보낸 대동강 연변의 금수산, 을밀대
도산 안창호는 1878년(고종 15년) 11월 9일 대동강 하류 도롱섬에서 농업에 종사하는 가난한 선비의 셋째아들로 태어났다.
평안남도 강서군 초리면 칠리 봉상도 가 그의 출생지이다.

아버지는 순흥(順興) 안(安)씨의 시조 문성공(文成公) 안향(安珦)의 후예로 안흥국(安興國)이라고 했고, 어머니는 황씨였다.

문성공은 안유(安裕)라고도 불리우는 고려 말기의 대표적인 학자로 중국 남송(南宋)의 성리학을 우리나라에 처음으로 수입했을 뿐 아니라, 우리나라 서원 설치의 효시가 되었으며, 안중근(安重根) 의사도 순흥 안씨이다.

안씨가 대대로 살던 곳은 평양 동촌(東村)으로 대동강 동편 기슭에 있으나 안흥국은 농토를 구하여 동촌에서 대동강 물결을 따라 하류에 있는 도롱섬으로 옮겨가 셋째아들 도산을 낳았다.

예로부터 풍치가 좋기로 소문났을 뿐 아니라 유서깊은 명승고적들이 자리잡고 있는 대동강 연변에서 자라난 도산은 유달리 대자연을 사랑하는 소년이었다고 한다.

(평양 남부산면 노남리로 이사하여 서당에 다니며 연상의 선각자 필대은과 교류가 시작될 무렵, 동네사람 들은 도산을 흔히 '노내미집 셋째' 라고 불렀다.
안씨 가문의 선산이 있는 대동군 남관면 노남리를 속칭 노내미라 했고, 당시 안창호의 집을 '노내미집' 이라고 불렀던 유래다.)
도산의 할아버지는 글 잘하고 엄한 분이었다.
손자가 말을 잘 안 들을 때면 꿇어앉혀 놓고 엄한 벌로 다스리곤 했다.

어느 날 40리 밖에 있는 고모집에 놀러 가고 싶었던 소년 안창호는 할아버지에게 꾸지람을 듣지 않기 위해 꾀를 내었다. 동네 할머니 한 분에게 부탁, 할아버지의 마음을 떠 보게 한 것이다. "우리 할아버지를 만나 나를 어디서 보았냐고 물으시거든 오늘 아침에 고모댁에 간다 하며 가더라고 하세요.

그래 보아서 우리 할아버지가 가만 있으시면 갔다 오고, 고얀 놈 같으니라구 거긴 또 왜 갔노! 하며 노하시면 그만두려 하니, 마음을 좀 떠보아 주시겠어요?" 결국 할아버지가 크게 노하지 않았다는 이야기를 전해 들은 후에야 마음 놓고 고모댁에 가서 며칠을 놀다 왔다고 한다.
어느 해 여름, 참외가 먹고 싶던 소년 안창호, 다짜고짜 원두막으로 달려든 뒤 "우리 할아버지가 나를 붙잡아 때리려고 쫓아오시니 야단났어요.

저 밭고랑 속에라도 좀 숨겨 주세요." 하고 가쁜 숨을 몰아쉬며 원두막 주인에게 매달렸다. 인정 많은 주인은 소년을 밭에 숨겨 주었고, 기회를 얻은 도산은 참외 넝쿨 밑에서 실컷 참외 맛을 보았다는 이야기다.

그러나 안창호의 거짓말과 도둑질을 안 그의 어머니는 '부지깽이가 동강이 나도록' 때리며 훈계하였고, 도산은 다시는 남의 것을 훔치지 않고 거짓말하지 않겠다고 맹세했다고 한다. '죽더라도 거짓이 없어라' 는 도산의 천성은 이때부터 비롯된 듯 하다.
도산은 어려서부터 미소년의 고운 목소리를 지니고 있었다.
더욱이 옛날 이야기책 읽기라면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재미를 느끼고 있었다.

소년이 동네 어른들로부터 남다른 귀여움을 독차지하게 된 것도 그들 앞에서 고담책을 읽어드리는 임무에 능숙했기 때문이다. 동네 노인들을 저녁이면 사랑방에 모여 '노내미집 셋째' 를 불러다가 구수한 옛날 이야기책을 읽게 하며, 그 재능에 탄복해 마지 않았다.

훗날 연사로서도 남다른 자질을 보이며 활약하는 도산의 모습을 엿보게 해주는 어린시절 일화이다.

구세학당, 1983년경의 교사와 학생들

남의 나라의 세력다툼이 우리땅에서 일어나 많은 이들이 고통받아야 했던 청·일 전쟁과 오랜 세월 썩어 빠진 관리와 양반들에게 고통받던 농민들이 전라도 고부에서 새로운 세상을 만들겠다고 일어난 동학 농민운동을 겪으며 도산은 위기에 처한 나라의 답답한 상황들에 대해서 고민하게 되고, 결국 서울로 가서 공부해야 겠다는 결심을 하게 된다.
집안의 반대가 있었으나 삼촌의 도움으로 어렵게 서울에 올라온 도산은 어느 날 정동 교회가 있는 골목을 지나치다가 '배우고 싶은 사람은 누구든 먹고 자고 마음대로 공부할 수 있으니 우리 학교로 오라' 고 권하는 미국인 선교사를 만난 것을 계기로 예수교 장로회에서 설립한 구세학당에 들어가 공부하게 된다.

구세학당에 입학하자 그는 송순명의 전도를 받아 예수교 장로회에 입교하여 신앙인이 되었다.
또한 산수. 지리. 세계사. 과학 등 새로운 학문을 배우며 새로운 세계관에 눈 뜰 수 있었다.
1896년 도산이 서울 유학을 마치고 고향으로 돌아 오자 집안에서는 도산의 약혼 문제가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당시 풍속대로 도산의 할아버지가 당사자의 의견도 듣지 않고 이석관(李錫觀)의 딸 이혜련(李惠練)을 손자며느리로 결정해 버린 것이다.

혼인은 당사자의 자유 의사로 정해야 된다는 새로운 사상을 접했던 도산은 어른들의 노여움을 살 것을 염두에 두고 종교가 다른 것을 이유로 파혼을 주장했으나 이석관의 집안이 도산을 사위로 맞이하기 위해 평양 등개터에 있는 교회당에서 전 가족이 입교할 뜻을 밝혔다고 한다. 도산은 두 번째로 자신은 공부를 했으나 이혜련은 교육을 받지 못했다는 이유로 파혼을 주장하였다.

쓸만한 사윗감을 놓치고 싶지 않았던 이석관은 "자네가 알아서 공부시켜달라" 며 딸의 교육까지 도산에게 위임하였다. 그리고 이에 도산은 1897년 약혼녀 이혜련과 여동생 신호(信浩)를 데리고 서울로 올라와 정신(貞信)여학교에 입학시켜 신학문을 배우게 하였다.
1896년 도산의 나이 19세 때, 서재필의 『독립신문』이 발간되고, 7월 2일에 독립협회가 결성되었다. 김옥균. 서광범. 홍영식 등이 주동이 된 개화파의 활약이 시작되었다.
이 해 11월 21일에는 서대문 밖 영천에 독립문이 세워졌다.
도산은 필대은과 함께 상의하며 민중의 각성을 촉구해야 겠다는 결론을 내리고 독립협회에 가담하였다. 이후 독립협회가 만민공동회로 발전함에 따라, 도산은 필대은 등과 평양에서 관서지부를 발기하고 쾌재정 연설을 통해서 민족 독립의 새로운 바람을 불러일으키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