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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1904년 2월 8일, 러.일전쟁 발발
2. 1905년 11월 18일, 을사조약 강제 체결
3. 1907년 7월 19일, 고종황제 퇴위

4. 1907년 8월 1일, 군대 강제해산

5. 1909년 10월 26일, 안중근, 이토 히로부미 저격 사살
 
1902년 영.일 동맹이 체결된 이래 한반도와 만주를 둘러싸고 팽팽히 맞서오던 러시아와 일본의 대립이 결국 전쟁으로 치닫게 되었다. 일본이 여순항에 정박중인 러시아 함대를 선전포고 없이 기습함으로써 전쟁이 시작되었다. 그리고 이 전쟁은 미국과 영국의 전폭적인 지지를 받으며 그간 치밀한 계획을 세워온 일본의 승리로 마무리 지어졌다. 1905년 9월 5일 미국 포츠머드에서 러.일전쟁이 일본의 승리로 끝났음을 알리는 포츠머드 강화조약이 체결되었으며 이로 인해 러시아는 일본이 한국에서 갖는 정치. 군사상의 권리를 인정하며 그간 한국과 맺어온 조약 체결 일체를 무효화 하는 것에 동의하게 되었다.
러일전쟁
온 국민 분노...전국에서 국권수호투쟁
을사조약 체결장면
1905년 11월 18일 일본은 이토 히로부미를 특사로 파견하여 한국의 외교권을 일본에 이양하는 것을 주요 내용으로 하는 이른바 을사조약을 강제로 체결했다. 이로써 조선은 독립국으로서의 지위를 상실하고 사실상 일본의 보호국으로 전락하게 된다. 11월 9일 입국한 이토 히로부미는 여러 차례에 걸쳐 고종을 알현하고 조약체결을 강요했으나 고종은 완강하게 거부했고 이에 이토는 완전무장한 일본군으로 궁궐을 포위하고 무력시위를 하며 대신들을 위협하여 억지로 동의와 기권을 받아내 조약체결을 발표하였다. 이 조약은 모두 5개조로 이루어져 있고 그중 중요한 내용은 일본 정부가 금후 한국의 외교사무를 통리. 지휘하며, 통감을 임명하여 한국 정부의 외교를 관할하게 한다는 것이다. 새로 임명되는 통감은 외교사무뿐만 아니라 사실상 국정 전반에 걸쳐서 간섭하는 준통치자로 군림할 것으로 예상된다. 이 을사조약 체결 소식이 알려지면서 전국 각계 각층에서 맹렬한 반대 투쟁이 전개되고 있다.
장지연 시일야 방성대곡
일본은 이 조약의 체결 사실을 당분간 비밀에 붙여두고자 하였으나, 「황성신문」은 조약체결 사실을 알아내고 이 사실과 함께 조약이 성립하기까지의 굴욕적인 과정을 소상히 보도해 국민의 분노를 불러일으켰으며 사장인 장지연은 "시일야 방성대곡" 이라는 제목의 논설을 실어 일본의 침략성을 규탄했다. 이로 인해 전현직 관리들과 유생들의 반대상소가 줄을 잇고 있으며 상가는 철시하고 학생들은 휴학을 단행하여 조약 체결에 반대하는 의지를 나타내었다. 또한 민영환의 할복 등, 각계 각층에서 순국사태가 이어지고 있으며 종로에서 시위대와 일본군이 충돌해 유혈사태를 빚기도 했다. 또 을사조약에 반대하며 직접 일제와 싸워 주권을 되찾으려는 의병항쟁이 전국에서 일어나고 있다.

고종황제의 행차
1907년 7월 19일 일본 통감부는 헤이그 밀사사건의 책임을 물어 고종황제를 강제로 퇴위시키고 황위를 황태자에게 넘기도록 했다. 양위식은 20일 오전 8시 중화전에서 거행됐는데 고종과 황태자 모두 참석하지 않고 대리인이 대신했다. 일본 정부는 그동안 고종황제에게 황제의 비준이 없어서 유효성 논쟁을 일으키고 있는 을사늑약에 비준할 것을 강요해왔으나 고종이 이를 계속 거부하자 이번 헤이그 밀사사건을 계기로 고종을 퇴위시킨 것으로 보인다.
이번 양위로 인해서 그동안 제한된 범위지만 어느 정도 유지되어 오던 고종의 정치적 영향력이 완전히 상실하게 되어 일본은 한국을 식민지화할 수 있는 기초를 마련하게 된 것이다.

해산명령에 항거하다 붙잡힌 군인
1907년 8월 1일 일제는 우리의 군대를 강제로 해산시켰다. 이로 인해 분노한 군인들이 서울과 지방 곳곳에서 항전을 벌이고 있다. 군대해산은 이완용과 이토 사이에 비밀리에 체결된 정미7조약의 부속각서에서 비롯된 조치이다. 그러나 이에 대하여 서울시위대 제1연대 제1대대장 박승환이 해산식에 참가하라는 명령에 불복하며 권총으로 자결하는 사건을 계기로 분노한 사병들이 일본인 교관들을 난사한 후 시가전을 벌인뒤 시외로 빠져나가는 사태가 벌어졌다. 이 해산 군인들은 의병부대에 합류하여 의병전쟁이라는 새로운 국면을 형성할 것으로 보인다.
안중근 의사가 하얼빈 역에서 이토 히로부미를 사살하는 현장 안중근 의사
1909년 10월 26일 만주 하얼빈 역에서 전 통감 이토 히로부미가 의병장출신 안중근의 권총저격에 명중, 현장에서 사살되었다. 안중근은 이토 히로부미가 러시아 재무장관 코코프체프와 회담하기 위하여 만주 하얼빈역에 온다는 소식을 듣고 살해를 결심한 것이다. 당시 현장에는 이토 히로부미를 맞이하기 위해 러시아 군인들과 각 나라 외교관, 일본인들이 일장기를 들고 모여 있었다. 이토가 막 열차에서 내려 환영하는 사람들에게 손을 흔드는 순간 안중근이 달려들어 총을 쏜 것이다. 안중근은 총을 쏜 후 "대한제국 만세" 를 몇 번이나 소리 높여 외쳤다고 한다. 이토는 폐와 배 부분에 총알이 명중되어 십여 분 만에 사망하였고 안중근은 "나는 의병장으로서 독립운동을 하는 사람이다. 그 일로 이토를 죽였으니 나는 살인범이 아니라 전쟁포로다" 라고 당당하게 말해 일본인들을 당황케 했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