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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의적 활빈당, 전국에서 활개
2. 1902년 3월 20일, 민간 전화업무 개시
3. 1903년 6월, 사진이 움직인다
4. 1904년 7월 16일, 「대한매일신보」창간
5. 1904년 8월 20일, 친일단체 일진회 창립
6. 1906년 신소설「혈의 누」연재
7. 1906년, 서양 운동 활발히 도입 중
8. 1907년 2월 국채보상운동
9.1909년 11월 1일, 창경궁 동물원과 식물원으로 전락
 
최근 활빈당이 삼남지방과 강원도 등지에서 출몰, 양반부호집을 습격하여 재물을 탈취, 그 일부를 빈농이나 빈민에게 나누어주고 도주하는 일이 빈발하고 있다. 현재 각 지방관청에서는 활빈당의 활동이 점차 지역을 넓혀가고 공권력을 비웃듯 대낮에도 마음대로 약탈행위를 일삼자 이를 진압해 달라는 전문이 빗발치고 있다. 이들 활빈당이 최초로 모습을 드러낸 것은 지난 1899년 충청도 지방에서 이고 1900년에는 경주 운문사와 양산 통도사에 수백 명씩 운집해 공공연한 본거지로 삼을 정도로 규모가 커졌다. 부자의 재물을 뺴앗아 가난한 이들에게 나눠준다는 이들의 행각은 「홍길동전」을 연상케 한다. 그러나 소설 속의 이야기가 현실의 실체로 등장한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고, 그만큼 우리가 처한 현실이 극적이라는 얘기가 된다.
1902년 3월 20일 민간인용 전화가 개통됐다. 그동안은 서울-인천간 시외전화만 개통돼 있었고 정부나 각국 공사관에만 가설돼 있었으나, 앞으로는 누구나 전화를 가정에 설치해 사용할 수 있게 되었다. 전화 요금은 시내, 시외에 관계없이 5분 한 통화에 50전이다. 한편 서울, 인천, 개성 세 곳에 공중전화도 설치됐으며 앞으로 설치지역을 넓혀갈 예정이라고 한다. 그러나 편리한 기계임에도 불구하고 갑오농민봉기와 청일전쟁 당시에 처음으로 전화가 도입되고 사용되어 전화는 곧 외세의 침략도구라는 인상이 우리나라 사람들에게 강하게 남아 전화 가입신청은 극히 저조한 형편이다.

서울 장안에 활동사진 상영
한성전기회사가 처음으로 활동사진을 상영했다. 소문으로만 들어오던 활동사진을 직접 본 사람들은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고 한다. 한 시민은 '꼭 귀신의 조화를 보는 것 같았다' 며 활동사진을 본 소감을 밝혔다. 이렇게 신기한 활동사진을 보려면 빈 담뱃갑 열 장을 모아서 동대문 전차종점의 영미연초회사를 찾아가면 된다.

대한매일신보
1904년 7월 18일 한. 영 합작의 민간신문인 대한매일신보가 창간되어 개화자강과 자주독립을 내걸고 언론활동에 나섰다. 타블로이드판 6면으로 발행되고 있는데, 한글판 2면에 영문판 4면으로 구성되어 있다. 발행인이 영국인 베델이어서 러. 일전쟁 발발 이후 계속되고 있는 일본측의 언론검열을 피할 수 있게 돼, 기존의 민간신문에 비해 민족의 자주 독립과 일본에 대항하는 비판 정신을 다룰 수 있을 것으로 보여 많은 이들의 기대를 모으고 있다.
1904년 8월 20일 종로에서 일진회가 창립되어 독립협회에서 활동했던 윤시병이 회장에, 유학주가 부회장에 선출되었다. 일진회는 창립 이후 일제히 회원들의 단발과 양복착용을 실시하고 이를 문명개화의 상징으로 내세우고 있다. 한편 9월 말 동학교도들이 일부는 상경하여 일진회에 가입하는가 하면, 지방에서는 일진회와 똑 같은 강령을 내걸어 진보회라는 단체를 조직하고 일제히 단발을 시행하여 세상을 놀라게 하고 있다. 일진회는 향후 일제 권력의 그늘 아래 한국 정부를 압박하면서 본격적인 친일활동을 전개할 것으로 보인다.
1906년 「만세보」에 이인직이 이제까지와는 전혀 다른 형태의 소설 「혈의 누」를 연재하여 화제를 모으고 있다. '혈의 누' 는 '피눈물' 이라는 뜻으로 여주인공 옥련이 러. 일 전쟁의 와중에 집안이 풍비박산되고 나서 겪는 파란만장한 이야기를 실감나게 엮은 것이다. 그 동안 읽어 오던 고대소설들은 작가가 모든 것을 이야기해주는 방식이었으나 '혈의 누' 에서는 이처럼 설명하는 방식을 쓰지 않고 마치 사건을 직접 눈으로 보고 귀로 듣는 것처럼 자세하게 묘사하는 방식을 사용하고 있어서 신선하다. 이런 방식은 작가 이인직이 일본에 유학하면서 서양식 근대소설로부터 배운 것이다. 그러나 일부에서는 작품에서 일본인 군의관이 여주인공 옥련이를 주해주는 것이나 주인공이 미국으로 떠나는 마지막 장면 등은 작가의 한계를 나타내는 것이라고 비판하기도 하였다.
축구와 야구 '인기 폭발'
:야구/
1906년 2월 17일 훈련원 마동산에서 황성기독교 청년회와 덕어학교 사이에 최초로 서양식 운동경기인 야구경기가 열렸다. 경기는 덕어학교의 승리로 끝났는데, 이를 지켜본 이들은 '이렇게 재미있는 경기는 처음' 이라며 감탄하였다고 전해진다. 야구 경기는 미국인 선교사 질레트가 황성기독교청년회원들에게 가르치면서 시작되었다고 한다.
:축구/
1906년 3월 에는 현양운, 신봉휴, 한상우 등 축구동호인들이 <대한체육구락부>를 결성하여 축구인구의 저변확대에 발벗고 나섰다. 축구가 처음 소개된 것은 1890년 경, 당시 외국어학교의 외국인 교사들이 학생들에게 축구를 가르쳤다. 지난 1899년에는 동소문 밖 삼선평에서 황성기독교청년회와 오성학교 사이에 공식 경기가 치러져 야구 못지 않게 많은 인기를 모은 바 있다.
대구에서 국채보상운동을 시작한 서상돈
'국채보상운동' 이 무서운 속도로 온 나라로 퍼져 가고 있다. 나라가 진 빚을 국민들이 돈을 모아서 대신 갚자는 것이다. 현재 우리 나라는 일본에 1300만원이라는 큰 돈을 빚진 상태, 1906년 3월 이토 히로부미는 '한국의 안전과 개발을 위해서' 라는 명목으로 어마어마한 이자와 불리한 조건으로 일본에서 1천만원이 넘는 돈을 빌려왔다. 그러나 정작 이 돈이 사용된 곳은 우리 나라에서 살게 될 일본인을 위한 생활시설을 짓는 것이었다. 결국 우리 정부는 꾸었다는 돈을 한푼도 만져 보지 못한 채 1천 3백만원이나 되는 큰 돈을 빚졌다는 증서만 쓰게 되었다. '국채보상운동' 을 제일 먼저 시작한 사람은 대구 사람 서상돈이다. 2천만 동포가 석 달 동안 담뱃값을 모으면 일본에 진 빚을 다 갚을 수 있다는 그의 말에 따라서 이미 '단연회' 도 조직된 상태이다. 또 이 운동은 여성들에게도 퍼져 나가고 있어 곳곳에서 비녀와 가락지 등을 모으는 부녀자들이 늘고 있다.

동물원으로 쓰일 당시 창경궁
1909년 11월 1일 창경궁에 동물원과 식물원의 개원식이 거행되고 이를 창경원으로 부르는 한편, 일반인의 관람이 허용되었다. 일제는 순종을 위로한다는 명목으로 선인문 안 보루각 터에 동물원을 짓고 그 안에 곰, 호랑이, 원숭이, 사슴, 공작, 학, 타조 등 각종 동물을 들여놨다. 또 춘당대 부근에는 식물원을 설치하고 그 북쪽에는 일본식 정자도 세웠다고 한다. 그러나 이것은 왕궁의 존엄성을 격하시키고 민족 정신과 민족 문화 유산을 말살하려는 계획에 불과하다는 거센 비판이 일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