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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1901년 12월, 제1회 노벨상 수여
2. 1903년 12월 17일, 인류, 드디어 하늘을 날다
3. 1905년 9월 5일, 제 2차 영.일동맹 체결
4. 1906년 12월 24일, 세계 최초 라디오 방송 성공
5. 1907년 7월 헤이그 만국평화회의에 대표파견
6. 1908년 3월 23일, 일본 앞잡이 스티븐스 샌프란시스코에서 피살
7. 하와이 이민 동포, 가죽 채찍 아래 노예생활
 
물리학상 뢴트겐, 평화상 앙리 뒤낭
노벨상은 스웨덴출신의 과학자로서 다이나마이트와 그밖의 폭발물을 발명해 특허권을 따냄으로써 엄청난 부를 축적한 노벨이 인류에 큰 공헌을 한 사람들에게 해마다 상을 주도록 유언을 남긴데서 비롯되었다. 1901년 12월 제1회 노벨상 수상자로 뢴트겐, 앙리 뒤낭 등 6명이 선정되었는데 독일인 빌헬름 뢴트겐은 X선을 발견해 물리학 및 진단의학 발전에 크게 기여한 공로를 인정받아 물리학상을 받게 되었고 적십자사를 창설해 인도주의를 실천한 앙리 뒤낭(스위스)과 국제평화연맹을 창설해 국제분쟁의 중재활동에 업적을 남긴 프레데릭 파시(프랑스)가 평화상을 공동으로 수상하였다. 이외에 문학상은 시인 쉴리 프뤼돔(프랑스)가, 의학상은 에밀 폰 베링(독일)이, 화학상은 야코부스 반트 호프(네덜란드)가 각각 수상하였다.
라이트형제 비행에 성공

라이트 형제의 플라이어호가 처음 비행하는 모습
1903년 12월 17일 아침 미국 킬데블 힐스에서 라이트 형제가 최초의 동력비행기인 '플라이어 1' 을 타고 공중 비행에 성공했다. 라이트 형제는 이날 첫 비행에서 12초를 날았고, 두 번째 비행에서 59초 동안 244m 를 날았다. 이로써 인류의 하늘날기가 현실로 다가오게 되었다.
1905년 9월 5일 포츠머드 강화조약이 체결되기 앞서 일본은 미국, 영국과 일련의 조약을 체결하여 한반도에서 자신의 지배권을 양국으로부터 인정받았다. 1905년 7월 27일 미국과 일본은 이른바 가쓰라. 태프트 밀약을 체결했다. 미국, 영국, 일본은 극동의 평화를 유지하기 위해서 실질적으로 동맹관계를 확보하며, 양국은 필리핀과 한국에서의 서로의 지배권을 승인한다는 것이다. 이어서 8월 12일에는 영국과 일본이 제2차 영.일동맹을 체결하여 일본이 한국에 있어서 정치. 군사상 및 경제상의 특수한 이익을 가지며, 영국은 일본이 이 이익을 옹호, 증진시키기 위하여 필요하다고 인정하는 지도.감리 및 보호의 조치를 한국에 대하여 취하는 것을 승인한다는 내용을 담고 있다.
1906년 12월 24일 미국의 매사추세츠 브랜트록에서 대학교수 레지널드 페선던이 라디오 방송을 하는 데에 성공했다. 페선던은 헨델의 <라르고> 연주를 전파로 바꾸어 공중으로 쏘아 보내면서 "누군가 이 방송을 듣는다면 나에게 연락해 주십시오" 라는 부탁을 함께 띄웠다. 바다 한가운데를 지나던 배 안에서 선원들이 이 방송을 듣고 "아주 잘 들린다" 라는 무선 내용을 보내와 세계 최초의 라디오 방송이 성공했음을 알렸다. 배 안에서 방송을 들은 선원들은 "이것은 기적" 이라며 당시의 감동을 전해왔다.

헤이그 밀사 이준, 이위종, 이상철(왼쪽부터)

1907년 7월 네덜란드 헤이그에서 개최된 만국평화회의에 고종황제의 밀명을 받은 이준, 이위종, 이상설 등 한국의 밀사들이 나타나 을사늑약이 무효임을 폭로하여 국제사회에 큰 충격을 주었으며 일본측을 당황하게 하였다. 그러나 이들 밀사들은 일본측의 집요한 방해공작으로 정식회의에는 참석하지 못하였다. 이에 이준은 울분을 참지 못하고 현지에서 순국했으며, 이위종은 만국기자회의 석상에서 '한국을 위하여 호소한다' 는 제목의 연설을 하여 일본의 침략성을 세계에 폭로했다. 이로 인해 국제적으로 위신을 손상당한 일본은 고종황제에게 이 사건에 대한 책임을 물을 것으로 예상된다.
장인환 전명운
1908년 3월 23일 아침 9시, 샌프란시스코 근처의 오클랜드역에서 전 한국 정부 고문 겸 통감부 촉탁 스티븐스가 한국인 청년 장인환과 전명운의 총격을 받아 사망했다. 스티믄스는 1904년 이래 한국 정부 외부 고문으로 재직하면서 일본의 이익을 충실하게 대변해온 인물로, 특히 최근 언론을 통해 일본의 한국 지배를 노골적으로 찬동하고 나서 한국인들의 격분을 사고 있었다. 이번 사건 이틀 전, 샌프란시스코에서 가진 기자회견에서 그는 "일본의 지배는 한국의 행복" 이라는 내용의 망언을 해 동포들의 분노를 산 것으로 알려졌다. 미국의 교포단체인 공립협회와 대한보국회는 공동으로 회의를 열고 장인환, 전명운 두 의사의 구명운동에 돌입하기로 했다.
좀더 나은 생활을 꿈꾸며 하와이로 이주한 한국 노동자들이 노비문서와 다름없는 명부에 얽매여 가죽채찍 아래서 노예와 다름없는 생활을 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이들은 4년간의 계약기간 동안 돈을 벌기는커녕 머나먼 이국 땅에서 목숨마저 잃는 경우가 많다는 소식이다. 한 방에서 5~6명이 함께 지내며, 새벽 4시 30분에 일어나 6시부터 오후 4시 30분까지 꼬박 일하고 있다 고된 노동과 열악한 환경을 피해 1905년부터 1907년 사이에 수천명의 한국인 노동자가 하와이를 탈출하여 미국의 캘리포니아로 이주하거나 멕시코 등지로 이주한 것으로 알려졌다. 그러나 그곳에서의 생활도 그리 낫지 못하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