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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1910년 4월 8일, 2차 망명
2. 암담한 청도회담
3. 1912년 11월 8일, 대한인국민회 중앙총회 성립

4. 1913년 5월, 흥사단 창립

5. 3. 1 만세운동과 상해임시정부
 
일제의 독립운동에 대한 탄압이 점점 심해지면서 도산 선생과 신민회 동지들은 국내와 국외로 세력을 나누어 힘을 기르며 조국 광복을 위해 힘쓰기로 결정하고 국내 책임으로는 서울에 전덕기, 평양에 안태국, 평북에 이승훈, 황해에 김구 등을 정했다. 구미 방면은 안창호·이갑이 맡고 연해주는 이동녕이 맡았다. 1910년 4월 8일 도산은 신민회 대변인격이었던 언론인이자 사학자 신채호·김지간과 일행이 되어 서울을 떠나 망명길에 올랐다. 이때 도산 선생은 망명의 길에 오르게 된 자신의 심정을 <거국가>를 지어 표현했다.

거국가

간다 간다 나는 간다
너를 두고 나는 간다
잠시 뜻을 얻었노라
까불대는 이 시운이
나의 등을 내밀어서
너를 떠나가게 하니
일로부터 여러 해는
너를 보지 못할지나
그 동안에 나는 오직
너를 위해 일할지니
나 간다고 설워 마라

영농중인 신흥무관 학교 학생
미국으로 가는 길에 도산 선생은 청도에 와서 많은 애국지사들을 만나 독립 운동의 당면 과제를 광범위하게 토론하는 시간을 가졌다. 도산 선생이 주재한 청도회담에는 유동렬·신채호·이종호·김지간·조성환·이강 외에도 이종호의 아우 이종만과 박영로·김희선 등이 참석하여 격론을 벌였다. 당시 유동열·김희선의 중심이 되어 자금을 신문과 잡지 경영에 쓰자하고 도산선생과 이갑은 만주에 농지를 개척하는데 쓰자고 주장하였다. 결국 최종적으로 이종호가 제공하는 자금으로 길림에 독립운동기지를 개척하자는데 합의 하였다. 당시 북만주 밀산에서는 이미 미주 한인들이 태동실업회사의 주식으로 땅을 사들여 개간하고 있는 중이였다. 이렇게 개간된 독립운동기지에 사관학교도 세워 독립군을 양성하자는 절충론이었다. 길림으로 가기 위해 블라디보스톡을 거쳐가는 시점에서도 도산 선생은 국민회 지회 및 학교설립을 의논하고 국권회복을 다짐하는 연설을 통해 동포들의 애국심을 다지는 등 활발한 독립운동을 펼쳤다.
1912년 11월 8일 대한인국민회 중앙총회가 샌프란시스코에서 성립되었다. 대회는 도산 선생을 중앙총회장으로 선출했다. 대한인국민회는 이미 1910년 5월에 국민회와 대동보국회가 통합하여 결성을 본 단체다. 도산 선생이 중앙총회를 지도하는 동안 도미해 오는 동포가 날로 늘어 나중에는 7천명의 재미 교포가 국민회 산하에 단결되어 국민회는 정부적 역할을 하였다. 대한인국민회는 나라를 잃어버린 36년간 일본의 간섭을 거부하고 미국내의 교포들의 권익을 대표하고 민권을 보호, 신장하는 활동만이 아니라 국외 한인사회를 통일적으로 연결하는 구심체 역활을 하였다.
흥사단의 청년단원들과 함께
1913년 5월 13일, 샌프란시스코에 있는 강영소의 집에서 한국 8도를 대표하는 흥사단 창립 위원들이 모여 흥사단 창립 총회가 개최되었다. '흥사단' 이라는 이름은 1908년에 본국에서 유길준이 조직했던 애국 단체의 이름이다. 사(士)를 일으킨다는 뜻으로 '진정한 애국자를 일으킨다' 는 뜻이었다. "흥사단의 목적은 무실역행으로 생명을 삼는 충의남녀를 단합하여 정의를 돈수하고, 덕·체·지 삼육을 동맹 수련하여 건전한 인격을 작성하고 신성한 단결을 조성하여 우리 민족 전도 대업의 기초를 준비함에 있다" 는 것이 흥사단의 약법에 명기된 목적 조항이다. 도산 선생은 이 흥사단의 조직을 통하여 민족의 독립에 앞장 설 차세대 지도자를 길러내는 데 힘썼다.
1919년 3·1일 독립만세운동과 함께 각지에서 임시정부를 조직해야 한다는 움직임이 활발하게 일었다. 도산 선생도 3. 1 운동 소식을 듣고 미주거민 대표로서 독립자금을 모아 상해에 도착하여 상해 임시정부에 합류하여 활동하기 시작했다. 상해에 도착한 지 한 달이 지난 1919년 6월 28일에는 대한민국 임시 정부의 내무 총장 겸 국무총리 서리에 취임했다. 도산은 대한인국민회로부터 지원받은 자금으로 프랑스 조계에 임시 정부 청사를 마련하고 청년 독립 운동가들과 함께 일을 시작했다. 또한 1920년 상해에 통합된 임시정부가 자리를 잡기까지 큰 공헌을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