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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1920년 8월 14일, 미국 국회 의원 동양 시찰단 만나
2. 1920년 봄, 흥사단 원동 위원부 설치
3. 1921년 5월, 국민대표회 개최 주도

4. 1924년 남경에 동명학원 설립

5. 1927년 길림사건 발생
 
1920년 8월 14일, 도산은 북경(北京)에서 미국 국회 의원 동양 시찰단을 만나 한국 독립의 협조를 호소했다. 앞서 임시정부는 한국 독립에 대한 미국 국회의원들의 이해를 증진시켜 국제 여론에 호소하기 위해 미국 의원단 접촉에 관한 준비 위원회를 조직하고 도산을 위원장으로 선임한 바 있다. 도산은 16일에 상원 의원 S.T 포터를 만난 것을 필두로 하여, 단장인 J.H스몰을 만났고, 18일엔 하원 의원 W.S 베어와 L.C 다이어를 만나는 등 개별적인 방문과 대화를 통해 한국 독립에 대해서 알리는 데 주력했다.
흥사단 원동임시위원부 청년들과 함께
도산은 늘 젊은 세대를 양성하여 독립운동을 지속시키는 것에 대해서 사명감을 가지고 있었다. 이러한 그의 생각이 가장 잘 반영된 것은 흥사단이다. 1920년 봄부터 도산 선생은 흥사단 사업을 중국에서도 일으키기로 결심하고 상해에 셋집을 얻어 단소로 정하고 흥사단 원동위원부를 설치했다. 상해에 와서 제일 처음에 입단한 청년은 이광수였다. 잇달아 주요한·박현환·김여제 등이 각기 입단식을 행하고 단원이 되었다. 원동 위원부는 나날이 발전하여 1920년도에 53명의 단원이 확보되었다.
임시정부가 대통령 이승만과 국무총리 이동휘의 독립운동 방략의 차이로 곧 내분에 휩싸이자 대통령 이승만의 위임통치안을 두고 논란이 거듭되면서, 이승만 대통령 취임 반대 운동이 전개되었다. 여기에 박용만의 외교총장 취임거부, 북경에서의 반 임정운동 등으로 임시정부가 흔들리자 도산은 대통령직을 수행할 수 있도록 이승만 대통령을 중심으로 단결해 줄 것을 호소하였다. 그러나 정국을 수습할 수 없게 되자 1921년 5월에 노동국 총판직을 사임하고, 여운형과 함께 국민대표회의 개최를 주도하였다. 1923년 124명의 대표들이 참석한 가운데 국민대표회의가 개최되었으나 여기서도 창조파와 개조파의 의견차이가 좁혀지지 않아 결국5월 15일 63회 회의를 끝으로 국민대표회의는 결렬되고 말았다.
1924년 도산은 12월에 미국으로 떠날 때까지 남경(南京)에 머무르며 동명학원을 설치하였다. 이 학원은 일제치하에서 고등교육을 받을 수 있는 기회가 차단된 청년들을 위하여 영어와 중국어를 가르치고, 군사학·병식체조 등을 통해 신체를 단련하고 또한 흥사단의 주의와 정신을 가르치고 지도해 청년들이 구미나 중국의 어느 대학이든지 유학하여 전문적인 지식을 배워 민족국가 건설에 일익을 담당할 수 있도록 훈련시키고자 하였다.
이상촌 후보지를 탐색하기 위해 도산은 만주를 방문하고, 도산이 만주에 온 것을 기회로 만주의 군사 단체 참의부·정의부 그리고 북만주의 신민부 등을 통합하여 일원화된 기관을 만들기 위한 회합이 길림에서 열렸다. 이탁의 집에 모인 독립운동계 간부들은 만주에 있어서 독립 운동의 기본 강령을 토의하였다. 도산 선생은 만주의 동료들은 모아 독립운동의 장래에 대한 강연을 하던 도중 무장을 갖추고 강연회장을 포위한 중국 경찰에게 동지 200여명과 함께 감금되는 사태가 발생했다. 1925년 6월, 중국 정부와 조선 총독부 사이에 만주에 있는 공산당 소탕을 위하여 만주 치안 당국과 일본 관헌이 공동 작전을 하기로 합의가 되어있던 것을 이용하여 일본측이 길림 회의를 공산당의 회합이라고 모함한 것이다. 그러나 중국 내 사회 여론으로 20일 만에 석방되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