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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1932년 4월 30일 도산, 상해의거로 일경에 체포
2. 1935년 2월 10일 대전 형무소 가출옥
3. 송태 산장에 은거

4. 1938년 3월 10일, 경성대학 부속 병원에서 서거

 
1932년 4월 30일 도산, 상해의거로 일경에 체포
윤봉길 의사의 상해 홍구 공원 폭탄 사건이 있은 후, 사전에 비밀 연락을 받지 못한 도산은 프랑스 조계에 있는 친구 이유필의 아들과 한 약속을 지키기 위해 이유필의 집을 방문했다가 일본 영사관 경찰과 합세한 프랑스 조계 경찰에 체포되었다. 도산은 국내로 압송되어 경찰 심문을 받는 과정에서 그는 꼿꼿한 자세로 "나는 밥을 먹어도, 잠을 자도 민족을 위해 먹고 잤으니, 앞으로도 민족을 위해 일하고자 함은 변함이 없다" 라는 자신의 행적과 생각을 주장하였다. 재판장에서도 도산의 의연하고 신념에 찬 모습으로 일관하였다. 도산은 결국 치안유지법 위반이라는 죄목으로 징역 4년을 선고 받게 되었다.

대전형무소에서 출옥 후 여운형과 함께한 모습

1935년 2월 10일, 도산은 대전형무소에서 가출옥하게 되었다. 나오는 길에는 조만식·김동원·여운형·주요한 및 그 조카딸 등이 영접했다. 그들과 함께 서울로 올라온 도산은 그를 찾아오는 많은 사람들과 대화하고 평양으로 올라가 고향을 방문하였다. 이후 지방을 순회하였다. 그러나 가는 곳마다 경찰의 감시가 심하고 도산을 만나는 사람들은 경찰의 호출을 피할 수 없었다고 한다.

영·호남과 평북 일대를 여행한 도산은 민간인들에게 괴로움을 주는 것을 피하여 송태산장에 은거하기로 했다. 송태산장은 평안남도 대동군 대보면 대보산 기슭에 도산이 손수 감독하여 지은 자그만한 집이다. 도산이 이곳에 은거함으로 인해서 송태산장은 점점 민족주의자들의 집결터가 되어 갔다. 도산은 총독부가 강제로 제재하지 않는 범위 안에서 민족성 혁신 사업을 계속하려고 한 것이다. 산장으로 찾아오는 많은 친구와 동지들과 더불어 토론하고 연설하면서 도산은 평남선 강선역에서 북쪽으로 바라다보이는 달마산 아래에 도산이 평생 꿈꾸어 왔던 이상촌을 건설할 계획을 세우기도 하였으나 실행에 옮기지는 못했다.
송태산장 전경

'동우회사건'으로 서대문 형무소에 수감되었을  당시의 도산

1937년 6월 28일, 도산은 '동우회사건'으로 다시 일본 경찰에 검거되어 서대문 형무소에 복역하게 된다. 이때 도산의 건강상태는 급속하게 나빠져 결국 12월 24일 병보석으로 재판소가 지정한 경성제국 대학병원에 입원하게 되었다. 그의 생질 김순원과 청년 박정호 두 사람이 그의 입원 중 시중을 들었으며 나중에는 그의 절친한 동지인 이갑의 딸 이정희가 끝까지 지성껏 병 간호를 했다. 죽는 순간까지도 그는 나라를 걱정하며 민족의 실력을 기르고 독립을 준비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결국 1938년 3월 10일 혼수 상태에서 일본 천황을 꾸짖은 도산은 끝내 조국의 독립을 보지 못하고 눈을 감았다. 그의 죽음이 알려지자 일제는 조문객의 방문을 철저히 금지시키고 망우리 묘소 장지에도 가지 못하도록 하였다. 그러나 많은 젊은이들은 "선생님이 남긴 말씀처럼 꾸준히 실력을 쌓아 나라의 독립을 이끌어 내겠다" 며 다짐했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