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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산은 1902년 9월3일 밀러목사의 주례로 이혜련 여사와 혼인한 뒤, 그 이튿날 교육학을 공부하기 위해 부부동반으로 미국에 가기위해 인천항을 출발하였다. 도산 부부는 일본 동경(東京)에서 1주일 머문 뒤, 하와이·밴쿠버을 거쳐 미국 시애틀에 도착하였다. 그리고 이들은 다시 기차편으로 샌프란시스코에 정착하였다. 도산은 미국에 정착하자 미국인 가정의 허드렛일을 하면서 가계를 꾸리는 동시에, 중학교에 입학하여 어린 학생들 속에서 공부를 시작하였다. 또한 1905년에는 한인친목회를 발전시켜 샌프란시스코에 공립협회를 창립하여 초대회장이 되었다.
1902년은 한국인들이 미국에 본격적으로 진출하기 이전의 시기이다. 한국인의 본격적인 미국이민은 1903년에 일부 한국인들이 하와이 사탕수수 농장에 노무자로 취직하면서부터인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따라서 도산의 미국유학은 당시 한국인으로서는 매우 커다란 모험이었다.
공립협회를 바탕으로 미국 내 한인조직이 완비되자, 도산은 국내에도 국민단체의 필요성을 인식하게 되었다. 이에 도산은 1907년 이강·임준기와 함께 대한인신민회를 발기한 뒤, 도릭(Doric)호를 타고 뉴욕에서 한국을 향해 떠났다. 귀국 중 일본에 도착한 도산은 1905년 창립된 동경 한국인 유학생단체인 태극학회에서 애국웅변을 하였다.
한국에 돌아온 도산은 이 후 신민회를 창립하고 전국을 돌며 국제정세와 한국의 처지를 국민들에게 전하였다. 또한 평양에 대성학교를 열어 교육사업을 시작했을 뿐만 아니라, 자기회사·태극서관 등을 세워 경제운동과 국민교양운동을 시도하였다. 하지만 안중근 의사가 이토오 히로부미(伊藤博文)를 처단하자, 그 배후세력으로 지목되어 일제에 피체되어 2개월 동안 취조와 옥살이를 하게 된다.
일제의 감시가 심해지자 더 이상 한국에서 활동하기 어렵다고 판단한 도산은 1910년 4월 망명길에 오른다. 도산은 황해도 행주를 출발하여 중국 북경에 도착하였으나, 이갑·유동열·김희선 등이 있는 청도로 간다. 그곳에서 도산은 이들과 회담을 갖고(청도회담), 길림성 밀산현에 땅을 구입하여 이주 한인의 생활 근거지로 개척한 후 사관학교를 설립하고 독립군을 양성할 것을 결의하였다.
이후 블라디보스톡으로 이동한 도산은 재러 한인들을 대상으로 민족운동을 전개하였다. 시베리아 국민회 지방회를 설립하고 재러 청년회원들과 함께 자선공제회 창립하였다. 도산은 이들 조직을 기반으로 한국인들을 통합하고 자치규율을 따를 것을 강조하였으며, 한인 야학교에서 역사를 가르치기도 하였다. 또한 재러 한인들의 지위를 확보하기 위하여 러시아당국과 협의를 하여 한인들의 신분보장을 약속받았으며, 그동안 허가되지 않던 신문발행 허가도 받아냈다.
러시아 한인사회 조직이 안정되기 시작하자, 도산은 블라디보스톡에서 미국으로 떠났다. 목릉·치타·이르크츠크·모스크바·페테르스부르그·베를린·런던을 거쳐 뉴욕에 도착한 도산은 세클라멘트로 가서 한인농장을 살펴 보고 샌프란시스코로 향하였다. 1911년 9월 샌프란시스코에 도착한 도산은 곧장 동포들의 환영회에 참석하여 연설한 것을 시작으로 샌프란시스코와 스탁톤 등지의 한인사회를 순회하고 한인사회의 결속과 조국의 독립을 위하여 미주 한인들도 노력해야 함을 강조하였다.
샌프란시스코로 돌아온 도산은 1912년 북미시업주식회사를 발기하여 경제운동을 시작하였다. 1917년에야 창립을 보게 된 이 회사는 "해외에 거주하는 우리 대한 남녀노소가 크게 합동하여 거대한 자본을 세워 농상공간에 가합한 것을 따라 실시하여 실업을 확장함"을 목적으로 하였다.
같은해 세계 여러 지역에 조직된 대한인국민회를 통일된 활동을 위하여 대한인국민회 중앙총회를 조직하여 중앙총회장으로 선임되었다. 당시 북미지방총회(이대위, 박용만, 김홍균), 하와이 지방총회(윤병구, 박상하, 정원명), 시베리아지방총회(김병종, 유주규, 홍신언), 만주지방총회(안창호, 강영소, 홍언) 등 12인이 대의원회를 개최하여 중앙총회 결성 선언문을 채택하였다.
도산은 이듬 해인 1913년 흥사단을 창립하였으며, 대한인국민회는 미국 국무성으로부터 '재미한인에 관한 것은 일본관리를 통하지 않고 직접 한인과 교섭한다'는 약속을 받아내기도 하였다. 또한 미국에서 태어난 2세 어린이들에게 우리 말과 우리 글을 가르치는 것을 목표로 대한인국민회 부설 클래어몬트 학생양성소를 재창립하였으며, 도산은 이 학교에 자주 찾아와 학생들에게 민족정신을 일깨웠다.
미주에서도 꾸준히 한인사회의 결속과 조국의 자주독립을 위해 노력하던 도산은 1915년 박용만과 이승만 사이에 있었던 갈등을 중재하기 위하여 하와이로 출발하였다. 하지만 도산이 하와이에 갔을 때는 이승만이 다른 곳을 떠난 상태였기 때문에 만날 수 없었다. 대신 도산은 하와이와 호놀룰루를 돌며 교민들에게 애국사상과 민족사상을 고취시켜 하와이 대한인국민회의 분쟁을 해결하였다.
도산은 1917년부터 1년 여 동안 멕시코의 여러 지역을 돌면서 한인들의 정황을 살펴보았다. 멕시코에는 비록 현대판 농노계약으로 건너간 한인들의 생활을 하고 있었다. 도산은 베라쿠르스·콰사콸코스·푸론테라·유카탄·탐피코 등지를 순회하면서 한인사회의 통합을 통합해 갔다. 도산은 이들을 지도하여 각종 악습을 금지하는 운동을 주도하고 한인 회관 건축, 국어학교 설립, 경찰소 조직, 실업회사 설립 등의 운동을 활발하게 전개하였다. 또한 멕시코의 한인사회를 통합한 도산은 멕시코 농장주들과 한인 노동자간의 새로운 계약 체결을 주도하였다.
멕시코에서 샌프란시스코로 돌아온 도산은, 대한인국민회 중앙총회장으로서 한인 전체대회를 소집하고, 뉴욕에서 열린 약소국 동맹회에 민찬호·정한경 대표로 파견하였다. 1919년에는 파리강화회의에 대표로 김규식을 위임하여 경비 3,500달러를 지원하는 한편, 파리강화회의에 참석한 각국의 대표들에게 한국대표의 출석을 강력히 요구하는 전문을 보냈다. 또한 대한인국민회 중앙총회에서 모금한 6,000달러를 직접 휴대하여 뉴욕, 호놀룰루, 홍콩을 거쳐 상해로 갔다. 상해에서 그는 국제동향을 한인사회에 알렸다.
상해에서 임시정부 내무총장 겸 국무총리 서리로 취임한 도산은 임시정부 국무령 제1호로 연통제 실시를 공포했으며, 임시정부 기관지 『독립』(22호부터는 『독립신문』으로 제호)을 창간하였을뿐만 아니라, 임시정부 임시 사료편찬회를 설립하여 『한일관계사료집』을 발간하였다. 내무총장 명의로 대한적십자 설립을 지도하였다. 또한 각 지역에 산재한 임시정부들을 통합하기 위해 적극적인 활동을 벌여나갔다.
1920년에는 북경을 방문한 미국 의원단을 개별 방문하여 외교 교섭을 하였으며, 일제가 주장하는 자치론을 반박하고 절대 독립론을 주장하였다. 한편 그는 한국·중국·러시아 3국이 연대관계를 맺고 러시아에 군사기관을 설치함으로써 위치를 확고히 하는 동시에 독자적인 재정자립을 위하여 정부조직의 개편을 주장하였으며, 1922년에는 만주의 통의군 결성에 참여하여 총장에 선임되었다.
1923년에는 독립단체의 분열을 막기 위하여 국민대표회의 본회의를 개최하여 부의장에 선임되었으며, 1924년에는 미주 흥사단의 자금원조를 받아 남경에 동명학원을 설립하였다.
1924년 12월 상해를 떠나 미국 샌프란시스코에 돌아온 도산은 이듬해에 덴버·시카고·필라델피아·뉴욕·뉴헤븐·보스톤·폴리우버·다뉴바·사우스벤· 디트로이트·캔사스·와밍햄 등지의 교포사회를 순회하면서 이들의 생활실태를 확인하고 독립운동의 소식을 전하고 애국애족을 강조하는 연설을 하였다.
미국 동부지역의 한인사회 순회를 마치고 돌아오는 길에, 몰몬교의 본산인 솔트레이크를 답사하고 도로배치·주택모형·건축재료·가로수 등을 관찰하며 이상촌 건설을 위한 조사를 실시하였다. 또한 샌프란시스코에 도착한 직후 스탁톤·다뉴바·삭클라멘트· 샌프란시스코·보슨톤·풀리우버 등지의 한인 벼농장을 순회하여 이들의 생활을 살폈다.
1926년 도산은 중국으로 돌아가는 중 하와이에 들려 한인 예배당에서 연설을 하였다. 그는 좀더 체류하며 동지들의 현황을 돌아보고자 이민국장과 면담까지 했으나 거절당하였다. 경유지인 오스트레일리아 시드니에 잠시 머무는 중에도 도산은 개척지에 대한 자료를 수집하는데 여념이 없었다. 조사를 마친 도산은 홍콩을 거쳐 상해에 도착하였다.
상해에 도착했을 때 자신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임시정부 국무령에 선임되어 있자, 도산은 취임을 거절하였다. 국내에서 발간되는 『동광(東光)』 잡지에 '산옹(山翁)'이라는 필명으로 애국애족과 관련한 각종 글들을 기고하였다. 상해 삼일당에서 민족의 대동단결을 주장하고 임시정부경제후원회를 결정하였다. 그리고 북경에서부터 유일독립당 성립을 위한 활동을 개시한 결과, 북경을 비롯한 상해·광동·무한· 남경·관내 등지에 유일독립당 촉성회가 설립되었다.
1931년에는 상해와 북경을 오가며 활동하면서 중국 국민당정부 및 중국의 각 운동단체 등과 한중합작 투쟁기구를 조직하기 위해 노력하였다. [중국 동포에게 경고한다]는 문서를 배포하여 한중 연합투쟁을 제안하였으며, 중국 국민당 좌파(광동정부) 왕정위(汪精衛)와 교섭하여 대일전선통일동맹을 결성하고자 하였다.
1927년 민족의 대동단결을 위한 유일당 결성을 위해 만주지역을 순회하는 중에도 도산은 이상촌 건설에 적합한 지역답사를 계속하였다. 길림성에 가서 동경성(東京城)과 경박호(鏡泊湖) 일대를 답사하였다. 길림에 머무는 중, 길림성 동대문 밖에 소재한 대동공사에서 [조선독립운동의 과거와 현재]라는 제목의 연설을 하였다. 이 자리에는 만주지역의 독립운동가들이 전부 참석 중이었다. 연설도중 중국경찰에 피체되었으나, 많은 사람들이 그의 석방을 강력히 요구하여 20여일 만에 석방되기도 하였다.
도산의 이상촌 건설을 위한 노력은 계속 이어져, 1929년에는 김창세 박사와 함께 필리핀을 방문하였다. 그는 필리핀에 대한인국민회 지부를 설치하고, 필리핀 총독부를 방문하여 한인 이주를 논의하였다. 마닐라에서 재필리핀 중국인이 발행하는 중국인 신문 『민초보』에 한국의 혁명방략을 게재하였다. 그 속에는 1. 혁명 총역량을 집중할 것, 2. 계통 조직적 진행을 실시할 것, 3. 경제협동의 운동을 촉진할 것, 4. 청년훈련운동을 제창할 것, 5. 일반민중으로 하여금 혁명의 이해를 마음에 감소케 할 것 등을 제안하였다. 또한 그 글에서 일본제국의 통치로부터 벗어나기 위해서는 정치·경제·군사행동 등을 할 것이며, 극단의 수단까지라도 써 볼 것이라고 결의를 밝혔다.
 
 
 
도산은 1878년 11월 9일 평남 강서군 초리면 칠리 봉상도에서 출생였다. 7세인 1885년에 평양 대동강면 국수당(國水塘)으로 이사하였으며, 13세인 1891년 서당에서 한문을 배웠다. 서당선배인 필대은과 교류하면서 신사조를 수용하였다.
서울에서 공부를 마치고 19세에 귀향한 뒤, 독립협회에 가입하고 만민공동회 관서지부를 발기하였다. 20세인 1898년 평양 쾌재정에서 만민공동회를 개최하여 웅변가로서 명성을 날렸으며, 평남 강서구 동진면 암화리에 점진학교와 탄포리교회를 설립하였다.
1902년 미국에 유학을 떠난 도산은 1907년부터 1909년 사이에 잠시 귀국하여 각종 애국계몽운동을 펼쳤다. 전국을 순회하며 동지들과 신민회 사업을 의론하였을 뿐만 아니라, 평양에 대성학교를 세웠다. 평양 마산동에 자기회사를 설립하고, 경제를 통한 국가부흥 운동을 이끌기도 하였다. 또한 평양·서울·대구 등지에 태극서관을 열어 책을 통한 국민계몽에도 힘썼다.
1909년 대성학교 학생들에게 융희황제의 서도 순행 환영 때 통감부에서 일장기를 들고 환영하라는 지시를 거부하여 일제로부터 요주의 인물로 집중감시대상이 되기 시작하였다.
가출옥 후 평양 대보산에 송태산장을 직접 설계하고 거주하였다. 도산은 이 산장을 후일 모범 농민주택의 견본이 될 것을 고려하였다. 도산은 이곳에서 1∼2년 머물다가 다시 국민계몽활동을 하고자 하였으나, 일제의 감시가 매우 치밀하게 이루어진 관계로 공식적인 활동을 거의 할 수 없었다. 대신 전국을 돌며 지방 영세민들의 생활과 민간교육상황, 농촌의 농민생활을 돌아보며, 지인들과 의론하였다.
1894년 청일전쟁이 일어나 평양에서 전투가 있자 잠시 피난한 도산은 서울로 상경하여 밀러학당에 입학하여 3년간 수학한다. 이 과정에 장로회 신자가 되었으며, 우수한 학생으로 인정받아 조교를 맡아보기도 했다.
미국 유학 중 한민족 단결의 필요성을 느낀 도산은 1907년 귀국하여 서울에서 신민회를 창립하였다. 1908년에는 평양, 대구와 함께 서울에 태극서관을 설립하여 책을 통한 국민의식고취에도 힘썼다.
이후 외국에서 독립운동을 해오던 도산은 1932년 윤봉길 의거의 배후세력으로 지목, 피체되어 서울로 압송당하였다. 1개월 남짓 취조를 받고 예심에 회부된 도산은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기소되어 서대문 감옥에 수용되었다.
그해 12월 도산은 경성지방법원으로부터 4년 실형을 선고 받았는데, (1) 1926년 7월중 상해 삼일당에서 상해 거주 백여명과 임시정부 재정후원회 조직, 현장에서 2백 여원을 거두어 임시정부 재무부에 교한 혐의, (2) 1919년 조선독립을 목적한 대한독립당 조직, (3) 1931년 11월 대일전선통일동맹을 조직하려고 했던 혐의가 적용되었다.
1908년에 서울, 평양과 함께 대구에 태극서관을 설립하여 책을 통한 국민계몽에 힘썼다.
1933년 서대문감옥에서 대전감옥으로 이감되었다. 옥중에서도 도산의 생활은 매우 단정하고 정갈하여 다른 수감자들과 간수들로부터 존경을 받았다고 한다. 도산은 1935년 2월 가출옥하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