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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구(1876~1949 황해도 해주 출신)
1876년 8월 29일 황해도 해주에서 출생했다. 15세 때 한학자 정문재 에게서 한학을 배웠고, 1893년 동학에 입교하여 접주가 되었다. 이듬해 팔봉도소접주에 임명되어 해주에서 동학농민운동을 지휘하다가 일본군에게 쫓겨 1895년 만주로 피신하여 김이언의 의병단에 가입하였다. 이듬해 귀국하여 일본인에게 시해당한 명성황후의 원수를 갚고자 일본군 중위 쓰치다를 살해하고 체포되어 사형이 확정되었으나 광무황제의 특사로 감형되었다. 복역 중 1898년 탈옥하여 공주 마곡사의 승려가 되었다가 이듬해 환속하여 1903년 기독교에 입교하였다.
 
 
1909년 황해도 안악의 양산학교 교사로 있다가 이듬해 신민회에 참가하고, 1911년 '105인 사건'으로 체포되어 종신형을 선고받고 복역 중 감형으로 1911년 출옥하여 김홍량의 동산평 농장 농감이 되어 농촌을 계몽하였다. 3·1운동 후 상해로 망명, 대한민국임시정부 조직에 참여하고 경무국장·내무총장·국무령을 역임하였다.
한인애국단을 조직하여 1932년 이봉창 의사의 일본왕 사쿠라다몬 저격사건, 윤봉길 의사의 상해 홍구공원 일본왕 생일축하식장의 폭탄투척사건 등의 의거를 지휘하였다. 1933년 남경에서 장제스(將介石)를 만나 한국인 무관학교 설치와 대일본전투방책을 협의하고 1935년 한국국민당을 조직하였다. 1940년 대한민국임시정부가 중경(重慶)으로 옮길 때 이를 통솔하였고, 한국 광복군 총사령부를 설치, 사령관에 지청천을 임명하고 1944년 대한민국임시정부 주석에 선임되었다.
1945년 대한민국의 이름으로 대일선전포고를 하는 한편, 광복군 낙하산부대를 편성하여 본국 상륙훈련을 실시하다가 8·15광복으로 귀국하였다. 그러나 임시정부가 미군정으로부터 정부로서의 정통성을 인정받지 못하였으므로 한국독립당 위원장으로서 모스크바 3상회의 성명을 반박하고 신탁통치 반대운동을 주도하였다. 1948년에는 남한만의 단독 총선거를 실시한다는 국제연합의 결의에 반대하여 통일정부수립을 위한 남북협상을 제창하고 북한으로 들어가 정치회담을 열었으나 실패하였다. 그 후 정부수립에 참가하지 않고 중간파의 거두로 있다가 1949년 6월 26일 경교장에서 육군 포병 소위 안두희에게 암살당하였다. 국민장으로 효창공원에 안장되었으며, 저서로는 『백범일지』가 있다.
 
 

관련사이트 : 백범김구선생기념사업회(http://www.kimkoo.or.kr/)

 
 
이갑(1877~1917 평안남도 평원 출신)
평안남도 평원에서 출생했다. 1896년 상경하여 독립협회에 가입한 후 만민공동회 간부로도 일하였다. 그 후 한국 육군무관학교를 졸업하고, 일본으로 건너가서 육군사관학교를 졸업하고 한국군의 참령이 되었다.
 
 
1905년에 을사오조약이 늑결되자 사직하고 항일운동에 가담하였다. 1906년 정운복·박은식 등과 계몽운동단체인 서우학회를 조직하여 민족의식 고취에 노력하였다. 1907년 안창호, 양기탁 등과 함께 비밀결사 신민회를 조직하여 광무황제의 양위를 반대하다가 피체되어 3개월간 옥고를 치루었다. 도산과 함께 청도회담에 참가한 후 시베리아로 망명하였다. 이후 러시아의 수도 페테르스버어그에 체류하면서 외교활동에 종사하던 중 중병에 걸렸다. 시베리아에서 이강과 함께 『대한인 정교보(正敎報)』를 발행하여 언론을 통한 독립운동과 계몽사업에 종사하였다.
 
 
 
이동녕(1869~1940 충남 목천 출신)
충청남도 천안에서 출생하였다. 1904년 제1차 한일협약 체결로 국권이 위축되자 전덕기·양기탁 등과 상동청년회를 조직, 계몽운동을 벌였다. 1905년 을사조약이 체결되자 조약폐기운동을 전개하다가 피체되었으나 곧 석방되었다. 그 해 북간도로 가서 이상설·여준 등과 용정에서 우리나라 최초의 해외사립학교인 서전의숙을 설립하고 교포교육에 힘썼다.
 
 
1907년 귀국, 안창호·김구 등과 신민회를 조직하고, 청년학우회 총무로서 활약하였다. 1910년 신흥강습소를 설립, 소장이 되어 독립군 양성과 교포교육에 힘썼다.
1911년 블라디보스토크로 가서 권업회를 조직하고, 『대동신문』, 『해조신문』을 발행하였으며, 1913년 대종교에 입교하고, 1919년 임시정부에 참여하여 의정원 의장·내무총장, 1921년 국무총리 서리를 역임 중 파벌싸움으로 임시정부가 위기에 놓이자, 안창호·여운형 등과 시사책진회를 조직, 단결을 촉진하였다. 1924년 재차 국무총리가 되어 군무총장을 겸직하고 이어 대통령대리가 되었으며, 1926년 국무령, 1927년 주석이 되었다.
1930년 도산과 함께 한국독립당 창당에 참여하여 이사장에 피선되었다. 1935년 양우조 등과 한국국민당을 조직, 당수가 되었는데, 1937년 중·일전쟁이 일어나자 한국광복진선에 가담하여 항일전을 구상하며, 1939년 김구와 전시내각을 구성, 조국광복을 위하여 싸우다가 1940년 3월 13일 사천성(四川省) 기강에서 병사하였다.
 
 
 
양기탁(1871~1938 평양 출신)
평안남도 평양에서 출생하였다. 어린 시절에는 한학을 공부하다가 상경하여 동학당 및 유림의 명망가이며 우국지시인 나현태를 만나 시야를 넓혔다.
 
 
1895년 영국인 선교사 게일(James Scarth Gall) 『한영자전』 편찬을 도왔고, 이듬해 독립협회에 가입했으며, 1898년에는 만민공동회의 간부로 활약하였다. 1902년 이상재·민영화·이준·이상설·이동휘 등과 개혁당 조직운동에 가담하였으며 1904년 러일전쟁을 도발한 일제가 조선에게 황무지 개척권을 요구하자 이에 반대하는 보안회의 운동에 참가하였다. 또 그해 7월 영국인 E.T.베델과 영자신문 『코리아 타임즈』를 발간하고, 1905년 11월 을사조약이 체결되자,『대한매일신보』를 창간하여 주필로 있으면서 국민들에게 항일사상을 심어 주었다.
1907년 안창호 등과 신민회를 조직하여 독립운동에 앞장섰으며, 1911년 '105인 사건'으로 피체되어 4년간 옥살이를 하였다. 1920년에는 통천교(統天敎)라는 종교를 창교하여 교리를 선포, 표면으로는 종교운동을 펼치고 내면으로는 독립운동을 추진하였다. 1924년 안창호와 양기탁은 만주농업사를 설립하고 만주지역에 수전농업을 경영할 계획을 추진하였다. 1925년 만주에서 정의부를 조직하고, 의용군을 국내에 파견, 일제를 공격하게 하였다.
1926년 고려혁명당(高麗革命黨)을 결성하여 정의부의 무장투쟁을 지원하였다. 그 뒤 1926년에 상해 임시정부 국무령에 추대되었으나 사퇴하였다. 1934년 임시정부 국무위원으로 선임되었고, 1935년 사퇴하였다. 이후 조선민족혁명당에 참여하며 항일 운동을 계속하다가 1938년 강소성(江蘇省)에서 병사하였다.
 
 
 
신채호(1880~1936 충남대덕 출생)
적과 타협 없이 독립투쟁을 전개하는 동안 '독립이란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쟁취하는 것이다'라는 결론에 도달하였고 이와 같은 견해를 곧 그의 역사연구에도 그대로 반영하여 '고조선' 과 '묘청의 난' 등에 새로운 해석을 시도하였으며 '역사라는 것은 아(我)와 비아(非我)의 투쟁이다'라는 명제를 내걸어 민족사관을 수립하고 한국 근대사학(近代史學)의 기초를 확립했다.
 
 
1880년 11월 7일 대전에서 출생하였다. 1897년 신기선의 추천으로 성균관에 들어가 1905년 성균관 박사가 되었으나, 그 해 을사조약이 체결되자 『황성신문』에 논설을 쓰기 시작하였다. 이듬해 『대한매일신보』의 주필로 활약하였으며, 내외의 민족 영웅전과 역사 논문을 발표하여 민족의식 앙양에 힘썼다. 1907년 신민회와 국채보상운동 등에 가입·참가하고, 이듬해 순 한글 『가정잡지』를 편집하고 발행하였다.
1910년 4월 신민회 동지들과 협의 후 중국 청도로 망명하여 안창호·이갑 등과 독립운동 방안을 협의하고 블라디보스토크로 건너가 『권업신문』에서 활동하였다. 1914년 권업신문이 강제 폐간되자 그 해 남북 만주와 백두산 등 한국 민족의 고대 활동무대를 답사하였다. 1915년 상해로 가서 신한청년회 조직에 참가하고, 박달학원의 설립 운영에도 힘썼다.
1919년에는 상해에서 대한민국임시정부 수립에 참가하여 의정원 의원, 전원위원회 위원장 등을 역임하였으나 한성임정 정통론과 이승만 배척운동을 내세워 공직을 사퇴하고 주간지 『신대한』을 창간하여 임시정부 기관지 『독립신문』과 맞서기도 하였다. 그 후 비밀결사 대동청년단 단장, 신대한청년동맹 부단주 등에 피선되었다. 1923년 민중의 폭력혁명으로 독립의 쟁취를 부르짖고 임시정부 창조파의 주동역할을 하다가 다시 북경으로 쫓겨가 '다물단'을 조직 지도했으며, 중국과 본국의 신문에 논설과 역사논문을 발표하였다.
1925년경부터 무정부주의를 신봉하기 시작하였고 1927년 신간회 발기인, 무정부주의 동방동맹에 가입하여 활동하였다. 1928년 잡지 『탈환』을 발간하고 동지들과 합의하여 외국환을 입수, 자금 조달차 대만으로 가던 중 기륭항(基隆港)에서 피체되어 10년형을 선고받고 여순(旅順) 감옥에서 복역 중 1936년 옥사했다.
 
 

참고사이트 : 사이버단재신채호기념관(http://www.danjae.or.kr/)